오늘은 유럽 도시 이야기 열네 번째 이야기로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가볼 만한 곳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베네치아는 지난번에 말씀드린 도시 이야기에서 120여 개의 섬으로 구성된 바다 위의 도시입니다. 오늘은 베네치아 여행할 때 필요한 여행준비와 둘러보아야 할 관광명소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가장 먼저 베네치아 여행을 하기 전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 여행준비
요즘같이 코로나19 때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 코로나 19 관련 입국 그리고 출국에 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이탈리아 입국 시와 한국으로 귀국 시 입국가능여부, 백신 필수 여부를 알아보겠습니다.
1.1 이탈리아 입국조건
▶입국가능여부: 입국 가능 ▶백신 필수 여부: 필수 아님 ▶여행지 격리여부: 격리 면제 (2022.10.28 기준 해당 내용은 코로나19 관련 국가별 출입국 제한 사항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하며, 자세한 사항은 각국 재외공관 홈페이지의 공지사항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정보출처 외교부 해외안전여행 안전공지)
1.2 한국 귀국 시
▶백신 접종자: 귀국 후 격리면제 ▶백신 미접종자: 귀국 후 격리면제 ( 2022.10.28 기준 , 정보출처: 질병관리청)
1.3 기타사항
▶비자는 무비자로 최대 90일 여행할 수 있습니다. ▶전압은 220 V 이어서 별도의 변압기가 필요 없습니다. ▶시차는 서머타임 적용 시 한국과 7시간의 시차가 있고 11월부터 2월까지는 8시간 시차가 있습니다.
1.4 필수 어플:
▶Omio: 유럽기차, 버스, 비행기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어플 ▶Trenit (트렌잇, 기차 정보): 이탈리아 기차 시간 정보와 승차권 구매할 수 있는 어플
이 두가지 어플은 이탈리아 여행 시 편리한 이동을 위해 꼭 필요한 어플입니다.
그럼 베네치아에서 꼭 봐야 할 관광명소 알아보겠습니다.
2. 베네치아 관광명소 및 가볼만한 곳:
1. 산 마르코 대성당 (Basilica di San Marco): 2. 두칼레 궁전 (Doge's Palace) 베네치아 전통의 건축물, 입장료 20 EUR 3. 리알토 다리 (Ponte di Rialto): 베네치아 대운하를 건널 수 있었던 다리 4.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Peggy Guggenheim Collection): 정원에서 산책하면서 대운하를 보면서 미술작품을 볼 수 있는 곳, 입장료 15 EUR 5. 산 마르코 종탑 (Campanile di San Marco): 99m로 베네치아에서 가장 높은 종탑 전망대) 입장료 8EUR 6. 탄식의 다리 (Ponte dei Sospiri): 두칼레 궁전의 법정과 운하 건너편의 감옥을 이어주는 탄식의 다리 7.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 (Basilica di Santa Maria della Salute): 바로크 양식의 성당 8. 시계탑 (Torre dell'Orologio): 5C 때 지어진 베네치아 시계탑 (12EUR) 9. T 폰다코 데이 테데스키 DFS (T Fondaco Dei Tedeschi): 명품, 이탈리아 고급 식재료와 기념품 등을 구매할 수 있는 쇼핑몰 10. 리알토 마켓 (Mercati di Rialto) 시장: 베네치아에서 가장 큰 전통시장 11. 베네치아 음악 박물관 (Museo della Musica): 비발디 시대 전후에 사용되었던 관람할 수 있는 악기 박물관 12. 산타마리아 델라 피에타 성당 (Chiesa di Santa Maria della Pieta): 음악가 비발디가 신부였을 때 미사를 집행했던 곳. 여기서는 매일 비발디 사계 공연이 열립니다.
3. 베네치아 대중교통 바포레토 (Vaporetto)
마지막으로 베네치아에는 특이하게 바포레토 (Vaporetto)란 수상택시가 있는데 이것을 이용해서 섬을 이동할 수 있습니다. 바포레토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탑승권을 먼저 구매해야 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유럽 도시 이야기 세 번째 이야기로 이탈리아 피렌체를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이미 우리에겐 영어식 발음 플로렌스로 많이 알려진 이탈리아 도시입니다.
피렌체는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주에 있는 도시입니다. 인구는 38만명이고 근교의 인구까지 합치면 총 약 150만 명입니다. 토스카나 주에선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도시이기도 하지요. 피렌체는 아르노 강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중세, 르네상스 시대 때 건축과 예술로 유명한 곳입니다. 또한 중세 유럽의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이기도 했고요.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를 오랜 기간 통치 했었고, 1865년에서 1870년까지는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였습니다. 피렌체는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도시입니다. 또한 1982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럼 피렌체는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볼게요.
1. 역사
피렌체는 무역업이 번창했고 중세시대에는 코무네 금융업 중심지로 불리었습니다. 또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탄생지이기도 합니다. 피렌체는 14세기에서 16세기 사이 유럽과 전세계의 도시들 중에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가장 중심지였습니다. 14세기 사용한 언어는 이탈리아어입니다.
중세 시대때부터 피렌체 자본으로 영국, 브뤼허, 리옹, 헝가리에 이르기까지 유럽 전역에 경제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피렌체 은행가들은 백년전쟁 동안에 잉글랜드 왕에게 자본을 기부하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비뇽 수도 건설과 로마로 귀환 후, 로마의 재건과 사업 등 교황청에게도 기부를 많이 했습니다. 피렌체는 이탈리아 귀족 역사상 가장 중요한 귀족 가문인 메디치 가문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여기엔 2명의 교황을 배출한 로렌초 데 메디차 가문도 피렌체 출신입니다. 16세기 초의 교황 레오 10세와 교황 클레멘스 7 세를 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카테리나 데 메디치는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와 결혼했습니다. 메디치 가문은 1569년 코시모 1세 데 메디치는 토스카나 대공으로 군림했다가, 1737년 잔 가스토네 데 메디치의 사망으로 가문의 문이 닫히게 되었습니다.
그럼 로마 기원 이전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BC 200년 전에 에트루리아인들은 여기에 피에솔레의 정착지로 자리를 잡으면서 소규모의 정착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다가 BC 80년 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이곳을 파괴시켰습니다. 오늘날의 피렌체는 BC 59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자신의 베테랑 병사들을 위한 정착지로서 이곳에 건설하였습니다. 원래 이름은 플루엔티아(Fluentia)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곳이 두 강 사이에 지어져 나중에 플로렌티아(Florentia)라 변경되었지요. 피렌체는 현재의 레푸블리카 광장이 교차되는 카르도, 데쿠마누스로 된 주요 거리에 있는 군영 형식으로 지어졌습니다. 로마와 북방 사이에 있는 주요 길인 카시아 가도에 자리잡고 있고, 아르노의 비옥한 계곡에 있어, 이 정착지는 빠르게 중요한 상업 중심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 후 몇 세기가 지나, 플루렌티아는 동고트인들의 지배라는 격동의 혼란 시기를 겪게 되었습니다. 이 기간에 동고트인들과 비잔티움 사이에 전쟁이 자주 발생되어 인구 감소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 후 6세기 롬바르디아족 통치가 이루어지면서 평화를 맞이했습니다. 피렌체는 774년 샤를마뉴에게 정복되었고 루카를 수도로 하는 토스카나 공화국의 일부가 되면서 인구는 다시 증가되고 상업이 번영하기 시작했습니다.
서기 1000년에 우고(Ugo) 백작은 서기 1000년에 피렌체를 루카를 대신한 그의 거주지로 정했습니다. 피렌체 미술은 이때 황금기를 맞게 되었고요. 1013년에 산 미니아토 교회(Basilica di San Miniato al Monte)가 이때 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1059년에서 1128년까지 산 조반니 세례당의 외부양식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재건축되었습니다. 이 기간에 피렌체의 옛 강력한 경쟁 도시인 피사가 쇠퇴하여 1406년에 피렌체의 통치하에 피사가 놓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자노 델라 벨라가 이끈 반 귀족주의 운동으로 오르디나멘티 디 주스티치아가 세워졌습니다.
그럼 르네상스 시대와 중세 시대 때 피렌체는 어떠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348년 피렌체는 양털 산업에 종사한 인구가 많았습니다. 1345년에 피렌체는 양털 노동자들의 반란과 폭동이라는 문제가 발생되었습니다. 1378년 치옴피의 난에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을 진압한 후에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의 경쟁 가문 알비치 가문의 통치하(1382–1434)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15세기 때 피렌체는 부와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한 도시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코시모 데 메디치는 이전의 피렌체에서 도시의 중요한 통제권을 가져온 메디치 가문의 첫 번째 인물입니다. 이 도시는 겉으로 보기에 민주주의 체제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권력은 젠타 누오바(gente nuova)라는 새로운 이주민들과의 동맹이 구축해온 관계에서 커졌습니다. 메디치 가문은 교황을 지지한 은행가 가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코시모는 그의 아들 피에로에게 자리를 물려주었지만 결국 코시모의 손자인 로렌초에게 1469년에 넘어갔다. 로렌초는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보티첼리등에게 작품을 부탁하여 이들을 후원해 주기도 했습니다. 1492년 로렌로 데 메디치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인 피에로 2세가 그 자리를 물려받았습니다. 프랑스 국왕 샤를 8세가 이탈리아 북부를 침략했을 때 피에로 2세는 자신의 군대와 함께 프랑스와 싸우기도 했습니다. 피사의 성문 앞에 있는 프랑스군의 규모를 보고서야 프랑스 국왕의 치욕적인 요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이로 인해 피렌체 폭동을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폭동자들은 피에로 2세를 1494년에 몰아내면서, 메디치 가문의 첫 통치는 공화정 정부가 수립되면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 이 때 도미니코회 수도사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1490년 매입한 마르코 수도원의 프라이어가 되었습니다. 이 수도사는 그가 본 부도덕성이 널리 퍼지고 물질적 부유에 대한 집착을 꾸짖는 회개 설교를 부르짖었고요. 그는 메디치 가문의 추방을 그들의 타락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정치적 개혁을 통해 더욱 민주적인 통치를 이끌고자 기회를 엿보기도 했지만 사보나롤라가 공개적으로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부패를 고발하자 그는 더 이상 종교활동 설교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 금지 사항을 지키지 않자 그는 결국 파문되었습니다. 그의 강한 설교에 피로감을 느낀 피렌체인들은 결국 그에게 등을 돌려 그는 체포당했습니다. 그는 이단으로 유죄를 판결 받아, 결국 1498년 5월 23일 화형 당했습니다. 피렌체에서 마키아벨리를 빼놓고 이야기를 할 수는 없겠죠?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독특한 통찰력을 가졌습니다. 마키아벨리는 통치와 권력 행사를 다룬 그의 정치 안내서 군주론로 가장 잘 알려진 사상가입니다. 메디치 가문의 요청으로 마키아벨리는 또한 도시의 역사를 담은 피렌체 역사서도 집필했습니다. 피렌체인들은 메디치 가문을 두 번째로 몰아내고 1527년 5월 16일 공화국을 재건했습니다. 그러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교황의 도움을 받아, 1537년에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의 세습 공작이 되었습니다. 1569년에는 두 세기를 지배한 토스카나 대공작이 되었습니다. 토스카나 지역에서 루카 공화국과 피옴비노 후국만이 피렌체에서 독립 상태로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1737년 로렌 공작이자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프란츠 1세의 즉위는 토스카나를 일시적으로 오스트리아 왕령지로 통치하러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합스부르크로렌 가문의 분가 가문이 되었습니다. 부르봉파르마 가문은 1807년 12월 프랑스가 토스카나를 합병되면서 폐위됩니다. 피렌체는 1808년부터 나폴레옹이 몰락하는 1814년까지 프랑스 아르노 데파르망의 행정 구역이 되었습니다. 합스부르크로렌 가문은 빈 회의로 인해 토스카나 대공 지위를 회복운 했지만, 1859년 결국 폐위되었습니다. 토스카나는 결국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의 행정 구역이 되었습니다. 피렌체는 1865년에 토리노를 대신해 이탈리아의 수도 역할을 했습니다. 도시를 현대화되면서 피아자 델 메르카토 베키오(Piazza del Mercato Vecchio)에 있는 옛 상가들과 많은 중세 주택들을 허물고 신식 주택과 전체적인 행정계획도시의 거리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광장이란 의미의 피아자 즉, 레푸블리카 광장는 거대하게 넓어졌고 거대한 개선문이 서쪽에 세워졌습니다. 이탈리아의 두 번째 수도인 피렌체는 6년 뒤 로마를 지키던 프랑스군의 철수로 이탈리아 왕국에 추가될 가능성이 생기며 로마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피렌체는 관광업, 상업, 금융업, 산업의 발전으로 인구도 20세기에 들어 예전에 비해 3배 가까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 피렌체는 오랫동안 독일군의 점령기(1943–1944)를 겪었고 무방비 도시로 되었습니다. 토스카나에서 활동하다 독일군에 피살당한 연합군 병사들의 묘지가 도시 외곽에 있습니다. 1944년 후퇴하던 독일군은 영국군이 강 건너는 것을 어렵게 만들기 위해 올트라노(Oltrarno) 지구와 도시의 나머지 지역을 연결하던 아르노 강에 있던 다리들을 파괴시켰습니다. 그러나 하를레 슈타인하우슬린(Charle Steinhauslin)이라는 독일군 장군이 베키오 다리의 역사적 가치를 고려해 부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대신 베키오 다리 남쪽을 따라 바로 있던 바사리 코리도르 같은 역사 지구의 거리들은 지뢰밭으로 사용되어 파괴되었습니다. 그 이후 아르노 강을 연결하던 다리들은 가능한 남아있는 재료들을 최대로 이용해 원래의 형태로 복구는 되었다고 하지만, 베키오 다리 주변 건물들은 현대와 옛 스타일을 혼합한 형식으로 복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럼 두 번째로 피렌체 도시의 볼거리 관광지를 알아보겠습니다.
2. 관광지
피렌체의 관광지로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산타 크로체 성당, 산 로렌초 성당,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우피치 미술관, 바르젤로 미술관, 아카데미아 미술관, 베키오 궁전, 베키오 다리, 피렌체 자연사 박물관이 있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피렌체 출신들이 누가 유명한지 알아보겠습니다.
3. 피렌체 출신 유명인
피렌체에선 화가, 건축가, 시인들 유명한 사람이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겠습니다.
• 해럴드 액턴 경 (작가) • 이오아니스 아르이로풀로스 (학자) • 단테 알리기에리 (시인) • 조반니 보카초 (시인) • 발다사레 보나이우티 (14세기 연대기 작가) • 산드로 보티첼리 (화가) • 아우렐리아노 브란돌리니 (농학자이자 개발 협력 학자) • 로버트 브라우닝과 엘리자베스 바렛 브라우닝 (19세기 잉글랜드인 시인) •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건축가) •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와 다비드 상의 조각가, 화가, 작가) • 로베르토 카발리 (패션 디자이너) • 카를로 콜로디 (작가) • 엔리코 코베리 (패션 디자이너) • 도나텔로 (조각가) • 오리아나 팔라치 (언론인이자 작가) • 살바토레 페르가모 (패션 디자이너이자 신발 제작자) • 마이크 프랜시스 (가수, 작곡가) • 갈리에로 갈리에리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천문학자, 철학자) • 조토 (4세기 초 화가, 조각가, 건축가) • 로렌초 기베르티 (조각가) • 구찌오 구찌 (구찌 브랜드 창시자) • 로버트 로웰 (시인) • 니콜로 마키아벨리 (시인, 철학자, 정치 이론가, “군주론”, “로마사 논고”의 작가_ • 마사초 (화가) • 로즈 맥고언 (피렌체 출신 배우_ • 안토니오 메쿠치 (전화기 발명가) •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현대 간호학의 개척자, 통계학자) • 발레리오 프론폰다발레 (플랑드르 화가) • 라파엘로 (화가) • 안나 사르파티 (아동 작가) •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개혁가) • 아드리아나 세로니 (정치인) • 조반니 스파돌리니 (정치인) • 안토니오 스콰르찰루피 (오르간 연주가이자 작곡가) • 에반젤리스타 토리첼리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 조르조 바사리 (화가, 건축가, 역사가) • 아메리고 베스푸치 (탐험가, 지도제작자) • 레오나르도 다 빈치 (예술가)
그럼 지금까지 유럽도시 이야기 중 피렌체를 살펴보았고 다음번 도시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