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유럽 도시 이야기 여덟 번째 이야기로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보통 많은 분들은 독일의 수도를 본으로 알고 계시는 분들이 있는데 통일이 되고 나서 베를린이 독일 수도가 되었습니다. 독일의 수도이면서 독일에서도 대도시이지만 EU에서도 대도시에 속합니다. 인구는 380만 명에 가깝습니다.
베를린은 통독 전에 동독 브란덴부르크 주에 속한 도시였습니다. 이 때 동베를린은 동독에서 관리하고 서베를린은 서독에서 관할했습니다. 동독 안에 있는 서베를린은 섬과 같은 도시였습니다.
그럼 우리나라의 비슷한 아픔을 가지고 있는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베를린의 역사
1500년 전에는 지금의 베를린 도시에는 여러 민족들이 살았는데 특히 슬라브 민족들이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1100년대에 게르만족이 이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만 하더라도 베를린은 작은 15세기에 들어서 베를린은 브란덴부르크주에서 아주 크고 중요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 15세기 후반에 호엔촐레른 왕가가 베를린에 자신의 관저로 만들었는데 30년 전쟁 때 베를린은 큰 피해를 입었고 이때 인구도 감소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를린 도시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황제 때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브란덴부르크주를 1640년부터 1688년까지 통치하였고, 경제와 산업을 발전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1701년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아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가 베를린을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로 삼았습니다. 1700년대에 베를린은 작은 도시에서 벗어나 제조업의 중심지로 자리를 잡으면서 도시가 성장했습니다. 예술과 과학, 경제와 산업이 신속하게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 1세가 1806년부터 1808년까지 베를린을 하였습니다. 그러다 나폴레옹이 떠나자 베를린은 다시 독일의 강국이 된 프로이센의 수도로 자리를 잡으면서 번창해졌습니다. 그 후 1871년 독일 제국의 수도가 되고 제2차 세계 대전 때까지 독일의 수도였지만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말에 독일 제국이 무너짐에 따라 베를린은 새 바이마르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이 전쟁 기간 동안에 파업, 폭동, 또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하여 베를린은 파멸의 도시처럼 변해갔습니다. 그러나 베를린은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1930년대에는 전 세계로 번져간 경제 대공황으로 베를린도 커다란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정권이 세워졌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군이었던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연합국 4개국이 독일을 나누어 통치했었고 또 동독 안에 있는 베를린도 4개로 분할하여 관리를 했었습니다. 그러다 독일이 분단되면서 베를린도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으로 분단되었습니다. 전쟁 전 까지만 하더라도 베를린이 독일의 수도였지만 분단 후 서베를린은 서독과는 다른 서방 연합군의 점령지로 간주되어 수도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통일 전 명목상 수도는 본이 되었습니다. 한편 동베를린도 소련군의 점령지로 간주되어 수도의 기능은 가지고 있었지만 명목상 동독의 수도는 포츠담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냉전기 동안 서베를린은 동독으로 둘러싸인 자유 진영의 섬이라고 불러졌습니다.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려는 동베를린 시민들이 늘자, 이를 막기 위해서 독일 민주공화국 정부는 1961년에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의 경계에 베를린 장벽을 세웠는데 아 장벽이 냉전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89년 냉전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은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1990년 독일이 전격적으로 통일되면서 베를린은 다시 독일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그럼 다음엔 독일의 수도, 분담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베를린에서 꼭 보아야 할 것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2 관광과 문화
이미 우리에겐 베를린 영화제로 잘 알려져 있듯이 베를린은 예술의 도시입니다. 베를린 필하모니도 유명하고요.
독일 명소로는 베를린을 대표하는 브란덴부르크 문과 그 주변 의회 의사당, 소련군 전승기념비, 홀로코스트 추모공원, 포츠담 광장, 동서 베를린 경계의 연합군-소련군 초소중 가장 유명한 체크 포인트 찰리가 있습니다. 또 연합군의 폭격을 맞은 유명한 베를린 Zoologischer Garten 앞에 있는 카이저 빌헬름 교회는 아직 폭격 그 모습 그대로 있습니다. 매년 2월에는 베를린 영화제도 열립니다 베를린 돔(성당)도 꼭 가야할 명소입니다. 베를린에는 박물관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는 페르가몬 박물관, 보데 박물관, 구 박물관, 신 박물관, 구 국립미술관, 이집트 박물관이 한 데 모여있는 박물관 섬(Museumsinsel)이 있습니다. 페르가몬 박물관은 근동의 유적들을 통째로 옮겨온 것으로 유명합니다. 베를린 성을 기준으로 슈프레 강 건너편에 냉전시대의 동독 시절 생활상을 인터랙티브 전시를 통해 체험할 수 있는 DDR 박물관이 있습니다. 또 베를린의 상징적인 음식이 되어 버린 커리부어스트(카레소시지) 박물관도 있고
베를린 옆에 있는 포츠담 회담으로 유명한 포츠담에도 볼거리가 많습니다.
또 베를린에는 쇼핑천국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베를린 동물원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쿠담 (Kurfürstendamm) 거리라고 부르는 명품거리와 알렉산더 광장에 갤러리아 백화점도 있어 쇼핑하기에 좋습니다.
그럼 오늘은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독일 도시 베를린에 대해 여기까지 말씀드리고 다음번 도시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오늘은 유럽 도시 이야기 다섯 번째 이야기로 이탈리아 친퀘테레에 있는 해안가 소도시들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친퀘 테레’에서 ‘친퀘’는 다섯을 의미하고, ‘테레’는 땅이란 뜻입니다.
친퀘 테레 (Cinque Terre)는 이탈리아 리비에라에 있는 절벽과 바위로 이루어진 해안마을 지역입니다. 친퀘 테레 는 이탈리아 라스페치아(La Spezia)의 서쪽에 있는 리구리아 지역에 있습니다 친퀘 테레(Cinque Terre)를 지역은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다섯 개의 땅으로 이루어진 지역입니다. 그 다섯개의 땅은 몬테로소알마레(Monterosso al Mare), 베르나차(Vernazza), 코르닐리아(Corniglia), 마나롤라(Manarola), 리오마조레(Riomaggiore)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해안 절벽 다섯 마을과 주변 언덕, 해변은 전부 친퀘 테레 국립공원의 일부이며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 해안절벽 도신들은 아주 오래 전 몇 세기 동안 절벽에 있는 가파른 지형에서 마을이 만들어졌습니다. 아직까지 이 마을들은 현대식으로 개발이 되지 않은 채 이 마을들 친퀘 테레(Cinque Terre) 여기서 오래 전의 전통마을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을들이 절벽위에 있어 차로 이동하기 힘이 들지만 그래도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관광도시입니다.
그럼 먼저 이 친퀘테레 지역의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역사
친퀘 테레(Cinque Terre)라는 도시의 이름은 11세기 역사적 문서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발전하기 시작한 지역은 몬테로소(Monterosso)와 베르나차(Vernazza)입니다. 그 이후16세기 때 터키가 침공했을 때 터키와 맞서기 위해 이 지역 주민들은 옛 요새를 강화하면서 새로운 방어 타워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600년대부터 친퀘 테레(Cinque Terre)는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14세기 때 라스페치아(La Spezia)의 군사 무기고가 짓게 되어 제노바(Genoa)와 라스페치아(La Spezia) 사이의 철도로 인해 이 지역이 다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 생긴 철도로 다른 지역과 고립되어 살았던 이 지역 주민들은 이 마을을 떠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전통적인 관습은 자연스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엔 이 지역의 빈곤화로 1970년대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그럼 이 지역에 볼거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2. 관광 및 교통
친퀘 테레(CInque Terre)는 해안절벽에 있는 마을들이어서 이 지역으로 통하는 길은 매우 적고 위험합니다. 베르나차(Vernazza)로 이어지는 길은 2012년 6월 개방되었지만 길이 매우 좁아 통행하기에 힘듭니다. 이 지역을 여행할 때는 차를 가지고 가는 것보다 기차로 가는 것을 추천합니다. 부득이하게 여행을 갈 때 차를 가져가신다면 되도록이면 라스페치아(La Spezia)에 주차를 해놓고 기차를 타고 마을로 들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라스페치아(La Spezia)에서 제노바(Genoa) 지역까지 가는 완행 열차는 다섯 마을 모두 정차합니다. 시외 열차는 친퀘 테레(Cinque Terre)부터 밀라노(Milan), 로마(Rome), 토리노(Turin)와 토스카나(Tuscany)까지 지난다. 다섯 마을 중 코르닐리아(Corniglia)를 제외한 나머지 네 곳을 지나는 여객선도 있습니다. 여객선은 제노바 항구(Genova’s old Harbour), 라스페치아(La Spezia), 레리치(Lerici), 포르토 베네레(Porto Venere)를 통해 친퀘 테레(Cinque Terre)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기엔 또 “하늘색 길(Sentiero Azzurro)”이라고 불리는 산책로 또한 다섯 마을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산책로로 이 해안절벽 마을들을 탐방하신 것도 좋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탈리아 해안절벽 도시 친퀘 테레에 대해 여기까지 말씀드리고 다음번 도시 이야기로 찾아뵐께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유럽 도시 이야기 네 번째 이야기로 이탈리아 베로나 도시에 대해 간단하게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베로나는 이탈리아 북부 베네토의 아디제 강변에 있는 중세 도시로 유명합니다. 지정학적으로 가르다호 인근 아디제 강변에 있어 경제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받은 도시이기도 합니다. 베로나 도시의 면적은206.63㎢, 인구는 약 265,000명입니다.
그럼 베르나 도시의 특징으로 무엇이 있을까요?
1. 문학과 문화의 중심지
무엇보다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 도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베로나의 두 신사,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이야기 배경이 된 장소이기도 합니다.
이곳 베로나에서는 BC 30년경에 건축된 로마시대 원형경기장에서 이탈리아 오페라 작가로 유명한 베르디의 작품이 공연이 개최되었던 도시입니다.
베로나 도시는 전통 미술품과 건축물, 공연예술 문화가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북이탈리아의 주요 관광지 중에 하나입니다.
그럼 베로나 도시의 볼거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2. 관광지
베로나 도시에 볼거리로 줄리엣의 집, 포르타 레오니, 포르타 보르사리, 시뇨리 광장 등이 있습니다.
베로나 도시는 요새도시로서의 건축사적 가치가 있어서 도시 자체가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3. 베로나 도시 여행 사용설명서
베로나 여행 시 다음과 같은 코스로 이동하면 여행 시 도움이 되실 겁니다.
베로나 아레나 → 줄리엣의 집→ 에르베 광장 → 시뇨리 광장 →
산타 아나스타시아 성당 → 베로나 두오모 → Castelvecchio Museum
그리고 베로나 도시에서 3곳 이상을 방문하신다면 ‘베로나 카드’를 사용하시는 것 추천드립니다. 베로나 카드로 버스 이용이 가능하고 시내의 대표 관광지 11곳도 무료로 입장할 수 있습니다. 관광 안내소나 각 관광지의 티켓 판매소에서 살 수 있고요. (요금 : 24시간 20유로 / 48시간 25유로)
안녕하세요. 오늘은 유럽 도시 이야기 세 번째 이야기로 이탈리아 피렌체를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이미 우리에겐 영어식 발음 플로렌스로 많이 알려진 이탈리아 도시입니다.
피렌체는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주에 있는 도시입니다. 인구는 38만명이고 근교의 인구까지 합치면 총 약 150만 명입니다. 토스카나 주에선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도시이기도 하지요. 피렌체는 아르노 강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중세, 르네상스 시대 때 건축과 예술로 유명한 곳입니다. 또한 중세 유럽의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이기도 했고요.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를 오랜 기간 통치 했었고, 1865년에서 1870년까지는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였습니다. 피렌체는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도시입니다. 또한 1982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럼 피렌체는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볼게요.
1. 역사
피렌체는 무역업이 번창했고 중세시대에는 코무네 금융업 중심지로 불리었습니다. 또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탄생지이기도 합니다. 피렌체는 14세기에서 16세기 사이 유럽과 전세계의 도시들 중에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가장 중심지였습니다. 14세기 사용한 언어는 이탈리아어입니다.
중세 시대때부터 피렌체 자본으로 영국, 브뤼허, 리옹, 헝가리에 이르기까지 유럽 전역에 경제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피렌체 은행가들은 백년전쟁 동안에 잉글랜드 왕에게 자본을 기부하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비뇽 수도 건설과 로마로 귀환 후, 로마의 재건과 사업 등 교황청에게도 기부를 많이 했습니다. 피렌체는 이탈리아 귀족 역사상 가장 중요한 귀족 가문인 메디치 가문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여기엔 2명의 교황을 배출한 로렌초 데 메디차 가문도 피렌체 출신입니다. 16세기 초의 교황 레오 10세와 교황 클레멘스 7 세를 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카테리나 데 메디치는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와 결혼했습니다. 메디치 가문은 1569년 코시모 1세 데 메디치는 토스카나 대공으로 군림했다가, 1737년 잔 가스토네 데 메디치의 사망으로 가문의 문이 닫히게 되었습니다.
그럼 로마 기원 이전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BC 200년 전에 에트루리아인들은 여기에 피에솔레의 정착지로 자리를 잡으면서 소규모의 정착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다가 BC 80년 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이곳을 파괴시켰습니다. 오늘날의 피렌체는 BC 59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자신의 베테랑 병사들을 위한 정착지로서 이곳에 건설하였습니다. 원래 이름은 플루엔티아(Fluentia)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곳이 두 강 사이에 지어져 나중에 플로렌티아(Florentia)라 변경되었지요. 피렌체는 현재의 레푸블리카 광장이 교차되는 카르도, 데쿠마누스로 된 주요 거리에 있는 군영 형식으로 지어졌습니다. 로마와 북방 사이에 있는 주요 길인 카시아 가도에 자리잡고 있고, 아르노의 비옥한 계곡에 있어, 이 정착지는 빠르게 중요한 상업 중심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 후 몇 세기가 지나, 플루렌티아는 동고트인들의 지배라는 격동의 혼란 시기를 겪게 되었습니다. 이 기간에 동고트인들과 비잔티움 사이에 전쟁이 자주 발생되어 인구 감소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 후 6세기 롬바르디아족 통치가 이루어지면서 평화를 맞이했습니다. 피렌체는 774년 샤를마뉴에게 정복되었고 루카를 수도로 하는 토스카나 공화국의 일부가 되면서 인구는 다시 증가되고 상업이 번영하기 시작했습니다.
서기 1000년에 우고(Ugo) 백작은 서기 1000년에 피렌체를 루카를 대신한 그의 거주지로 정했습니다. 피렌체 미술은 이때 황금기를 맞게 되었고요. 1013년에 산 미니아토 교회(Basilica di San Miniato al Monte)가 이때 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1059년에서 1128년까지 산 조반니 세례당의 외부양식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재건축되었습니다. 이 기간에 피렌체의 옛 강력한 경쟁 도시인 피사가 쇠퇴하여 1406년에 피렌체의 통치하에 피사가 놓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자노 델라 벨라가 이끈 반 귀족주의 운동으로 오르디나멘티 디 주스티치아가 세워졌습니다.
그럼 르네상스 시대와 중세 시대 때 피렌체는 어떠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348년 피렌체는 양털 산업에 종사한 인구가 많았습니다. 1345년에 피렌체는 양털 노동자들의 반란과 폭동이라는 문제가 발생되었습니다. 1378년 치옴피의 난에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을 진압한 후에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의 경쟁 가문 알비치 가문의 통치하(1382–1434)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15세기 때 피렌체는 부와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한 도시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코시모 데 메디치는 이전의 피렌체에서 도시의 중요한 통제권을 가져온 메디치 가문의 첫 번째 인물입니다. 이 도시는 겉으로 보기에 민주주의 체제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권력은 젠타 누오바(gente nuova)라는 새로운 이주민들과의 동맹이 구축해온 관계에서 커졌습니다. 메디치 가문은 교황을 지지한 은행가 가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코시모는 그의 아들 피에로에게 자리를 물려주었지만 결국 코시모의 손자인 로렌초에게 1469년에 넘어갔다. 로렌초는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보티첼리등에게 작품을 부탁하여 이들을 후원해 주기도 했습니다. 1492년 로렌로 데 메디치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인 피에로 2세가 그 자리를 물려받았습니다. 프랑스 국왕 샤를 8세가 이탈리아 북부를 침략했을 때 피에로 2세는 자신의 군대와 함께 프랑스와 싸우기도 했습니다. 피사의 성문 앞에 있는 프랑스군의 규모를 보고서야 프랑스 국왕의 치욕적인 요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이로 인해 피렌체 폭동을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폭동자들은 피에로 2세를 1494년에 몰아내면서, 메디치 가문의 첫 통치는 공화정 정부가 수립되면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 이 때 도미니코회 수도사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1490년 매입한 마르코 수도원의 프라이어가 되었습니다. 이 수도사는 그가 본 부도덕성이 널리 퍼지고 물질적 부유에 대한 집착을 꾸짖는 회개 설교를 부르짖었고요. 그는 메디치 가문의 추방을 그들의 타락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정치적 개혁을 통해 더욱 민주적인 통치를 이끌고자 기회를 엿보기도 했지만 사보나롤라가 공개적으로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부패를 고발하자 그는 더 이상 종교활동 설교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 금지 사항을 지키지 않자 그는 결국 파문되었습니다. 그의 강한 설교에 피로감을 느낀 피렌체인들은 결국 그에게 등을 돌려 그는 체포당했습니다. 그는 이단으로 유죄를 판결 받아, 결국 1498년 5월 23일 화형 당했습니다. 피렌체에서 마키아벨리를 빼놓고 이야기를 할 수는 없겠죠?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독특한 통찰력을 가졌습니다. 마키아벨리는 통치와 권력 행사를 다룬 그의 정치 안내서 군주론로 가장 잘 알려진 사상가입니다. 메디치 가문의 요청으로 마키아벨리는 또한 도시의 역사를 담은 피렌체 역사서도 집필했습니다. 피렌체인들은 메디치 가문을 두 번째로 몰아내고 1527년 5월 16일 공화국을 재건했습니다. 그러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교황의 도움을 받아, 1537년에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의 세습 공작이 되었습니다. 1569년에는 두 세기를 지배한 토스카나 대공작이 되었습니다. 토스카나 지역에서 루카 공화국과 피옴비노 후국만이 피렌체에서 독립 상태로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1737년 로렌 공작이자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프란츠 1세의 즉위는 토스카나를 일시적으로 오스트리아 왕령지로 통치하러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합스부르크로렌 가문의 분가 가문이 되었습니다. 부르봉파르마 가문은 1807년 12월 프랑스가 토스카나를 합병되면서 폐위됩니다. 피렌체는 1808년부터 나폴레옹이 몰락하는 1814년까지 프랑스 아르노 데파르망의 행정 구역이 되었습니다. 합스부르크로렌 가문은 빈 회의로 인해 토스카나 대공 지위를 회복운 했지만, 1859년 결국 폐위되었습니다. 토스카나는 결국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의 행정 구역이 되었습니다. 피렌체는 1865년에 토리노를 대신해 이탈리아의 수도 역할을 했습니다. 도시를 현대화되면서 피아자 델 메르카토 베키오(Piazza del Mercato Vecchio)에 있는 옛 상가들과 많은 중세 주택들을 허물고 신식 주택과 전체적인 행정계획도시의 거리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광장이란 의미의 피아자 즉, 레푸블리카 광장는 거대하게 넓어졌고 거대한 개선문이 서쪽에 세워졌습니다. 이탈리아의 두 번째 수도인 피렌체는 6년 뒤 로마를 지키던 프랑스군의 철수로 이탈리아 왕국에 추가될 가능성이 생기며 로마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피렌체는 관광업, 상업, 금융업, 산업의 발전으로 인구도 20세기에 들어 예전에 비해 3배 가까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 피렌체는 오랫동안 독일군의 점령기(1943–1944)를 겪었고 무방비 도시로 되었습니다. 토스카나에서 활동하다 독일군에 피살당한 연합군 병사들의 묘지가 도시 외곽에 있습니다. 1944년 후퇴하던 독일군은 영국군이 강 건너는 것을 어렵게 만들기 위해 올트라노(Oltrarno) 지구와 도시의 나머지 지역을 연결하던 아르노 강에 있던 다리들을 파괴시켰습니다. 그러나 하를레 슈타인하우슬린(Charle Steinhauslin)이라는 독일군 장군이 베키오 다리의 역사적 가치를 고려해 부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대신 베키오 다리 남쪽을 따라 바로 있던 바사리 코리도르 같은 역사 지구의 거리들은 지뢰밭으로 사용되어 파괴되었습니다. 그 이후 아르노 강을 연결하던 다리들은 가능한 남아있는 재료들을 최대로 이용해 원래의 형태로 복구는 되었다고 하지만, 베키오 다리 주변 건물들은 현대와 옛 스타일을 혼합한 형식으로 복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럼 두 번째로 피렌체 도시의 볼거리 관광지를 알아보겠습니다.
2. 관광지
피렌체의 관광지로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산타 크로체 성당, 산 로렌초 성당,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우피치 미술관, 바르젤로 미술관, 아카데미아 미술관, 베키오 궁전, 베키오 다리, 피렌체 자연사 박물관이 있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피렌체 출신들이 누가 유명한지 알아보겠습니다.
3. 피렌체 출신 유명인
피렌체에선 화가, 건축가, 시인들 유명한 사람이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겠습니다.
• 해럴드 액턴 경 (작가) • 이오아니스 아르이로풀로스 (학자) • 단테 알리기에리 (시인) • 조반니 보카초 (시인) • 발다사레 보나이우티 (14세기 연대기 작가) • 산드로 보티첼리 (화가) • 아우렐리아노 브란돌리니 (농학자이자 개발 협력 학자) • 로버트 브라우닝과 엘리자베스 바렛 브라우닝 (19세기 잉글랜드인 시인) •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건축가) •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와 다비드 상의 조각가, 화가, 작가) • 로베르토 카발리 (패션 디자이너) • 카를로 콜로디 (작가) • 엔리코 코베리 (패션 디자이너) • 도나텔로 (조각가) • 오리아나 팔라치 (언론인이자 작가) • 살바토레 페르가모 (패션 디자이너이자 신발 제작자) • 마이크 프랜시스 (가수, 작곡가) • 갈리에로 갈리에리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천문학자, 철학자) • 조토 (4세기 초 화가, 조각가, 건축가) • 로렌초 기베르티 (조각가) • 구찌오 구찌 (구찌 브랜드 창시자) • 로버트 로웰 (시인) • 니콜로 마키아벨리 (시인, 철학자, 정치 이론가, “군주론”, “로마사 논고”의 작가_ • 마사초 (화가) • 로즈 맥고언 (피렌체 출신 배우_ • 안토니오 메쿠치 (전화기 발명가) •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현대 간호학의 개척자, 통계학자) • 발레리오 프론폰다발레 (플랑드르 화가) • 라파엘로 (화가) • 안나 사르파티 (아동 작가) •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개혁가) • 아드리아나 세로니 (정치인) • 조반니 스파돌리니 (정치인) • 안토니오 스콰르찰루피 (오르간 연주가이자 작곡가) • 에반젤리스타 토리첼리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 조르조 바사리 (화가, 건축가, 역사가) • 아메리고 베스푸치 (탐험가, 지도제작자) • 레오나르도 다 빈치 (예술가)
그럼 지금까지 유럽도시 이야기 중 피렌체를 살펴보았고 다음번 도시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